告別辭(고별사)
우리 어머니 돌아가신 날, 숙부님은 마음으로 우셨다.
어쩜 눈에서 줄줄 흐르는 눈물을 머금고 이 글을 쓰신 것,
지금 내 나이 이 글을 쓰신 것 보다 훨씬 더 지났다.
울컥하는 마음에 이 글을 남겨두려 한다.
2009년 1월 24일(음 12월 29일) 형수님이 숨을 거둔지 49일이 되어 이제 형수님을 극락정토, 하늘나라로 보내드리려 하옵니다. 지난 49일 동안 저 세상의 경계에서 혼돈과 어둠속에서 차마 떠나지 못하는 형수님을 이제 편안함과 영생의 세계로 보내드리려 합니다.
이제 형수님을 보내드리면서 형수님과 만남을 되새겨 봅니다. 형수님은 7살난 아이의 최초 이방인이었습니다. 그 후 50년동안 우리 가족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셨습니다. 저는 감히 오늘 이 자리를 빌어 형수님을 ‘조선의 마직막 여인’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전 시대의 모든 관습을 물려받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떼밀려 떠나갈 수밖에 없는 시대적 운명 속에서 생을 마감하신 것 같습니다.
제 나이 7살 때, 당신은 꽃다운 나이 18세. 연지 곤지 찍고, 가마타고 시집오던 날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엎어진 바가지를 깨고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낭자틀고 가마타고 결혼한 것도 형님과 형수님이 마지막이 아니었던가 생각이 듭니다.
얼핏, 조카들이 태어나기 전 형수님과 티격태격하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어린 시동생에게 어쩔 줄 몰라하던 모습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조선 여인들의 恨(한)스런 환경들이 모두 주어졌습니다. 넉넉지 못한 집안 살림에 많은 시동생들. 게다가 시어머니는 당신의 자식보다 어린 시동생을 낳았답니다. 시집가기 전 쌀 서말을 먹으면 다행이었다는 시절. 당신은 부엌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둘째 형수를 얻은 뒤에서의 일입니다. 이것이 조선 여인의 농촌 실상이었습니다.
형님은 큰애를 낳고 3년 동안 군대생활을 하셨고, 제대 후에는 대전에 나가서 사업을 하셨습니다. 형님을 만나기 위해 형수님을 따라 대전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초등학교 3~4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신혼 초기에 형님과 떨어져 산 시간이 많았으니 시집살이의 고달픔인들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때까지도 형수님은 낭자를 틀고 계셨고, 시대 흐름에 거역할 수 없는 당시의 환경들은 가족 갈등으로 증폭되었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시동생들 뒷바라지가 끝날 무렵에서야 증골서 샛터로 이사를 했는데, 다시 자식들 뒷바라지에 손 놀 날이 없었습니다. 아직도 자식들 뒷바라지가 끝나지 않았는데... 아직도 할 일도 많은데... 누리고 싶은 것도 많은데... 형수님께서는 한스런 여인의 모습으로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시동생들한테 서운해 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 고생하셨는데 변변히 뭐 하나 제대로 해드린 것이 없다는 후회도 듭니다. 당신 자식들이 장성한 후에야 자식들도 별 수 없다는 말로 그 감정을 대신 나타내셨습니다.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자식 자랑을 하니깐 형수님께서도 호강한 얘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찬독이 덕분에 ‘수안보 온천’을 다녀왔다는 것입니다. 칙사 대접을 받았다는 얘기를 하고 또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 갔다 온 얘기를 들을 때도 ‘수안보 온천’ 얘기를 또 하셨습니다.
정말 형수님께 비행기를 태워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설날에는 조카들한테 ‘외국 여행’을 해드리자는 얘기도 꺼냈습니다. 그 때 ‘일이나 끝나고 가야지!’ 하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남들 다 타보는 비행기가 소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비행기 한 번 못타본 조선의 마지막 여인으로 그냥 떠나셨습니다.
당신 시어머니도 그렇게 녹녹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런 시어머니와 무던히도 잘 견디시고 이겨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나도 시어머니가 사셨던 것처럼 밭에서 앉아 있다가 그냥 죽을 것 같다!’는 신세 한탄도 하셨습니다.
당신의 시아버지는 당신에게는 스승이요, 敎主(교주)였습니다. 당신을 가르치신 것이 시아버지라 늘 말씀하시면서 어머니가 떠나신 후 지극정성으로 시아버지를 모셨습니다. 그 시아버지가 晩年(만년)에 가장 사랑하셨던 것도 바로 당신이셨던 것 같습니다. 푼푼히 모은 돈으로 당신의 시계를 사다가 주시면서 그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구보다도 당신을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당신의 남편, 우리 형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늘 형님 말씀에 따르기만 했던 당신이었습니다. 모든 농사도 형님의 지시에 따라 그렇게 하기만 했던 당신이었습니다. 형님이 癡呆(치매)기가 있을 때, 가장 몹쓸 병에 걸렸다고 한탄하던 생각이 납니다. 천하에 몹쓸 병이 바로 치매라고...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기로 작정한 것도 바로 당신의 증상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부터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가슴이 아픕니다.
천하에 몹쓸 병으로 자식들 고생 안 시키겠다... 그런 생각이셨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가장 걱정 많이 하신 것은 자식들의 우애였습니다. 자식들이 장성하면 다른 집 식구들과 짝을 이루고, 그 사이에서 자식들이 태어나기 마련입니다. 어느 날 형수님께서는 ‘자식들이 우애 좋기는 틀린 것 같아’ 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러면서도 ‘찬독이네’를 따돌린다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느냐’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러면서 형수님이 우리 집에 시집오던 때의 우리집 풍속도가 생각이 납니다.
당시 정월 보름에는 安宅(안택)을 했는데, 그 안택 담당자는 뜸밭 고모였습니다. 그 때에는 집안에 ‘神(신)’이 참 많았습니다. 안방에는 물론이고 우물, 장광, 심지어는 변소까지 신이 있었습니다. 떡을 해다 바쳐야 했습니다. 집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증골 밖 냇가에까지 가서 용왕님을 모셔야 했습니다. 그 神(신)들이 사라진 것은 내가 중학교 언저리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판단에 의한 용단이었는데... 당시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던 듯한 생각이 듭니다. 그 뒤 당신의 시아버지는 自神(자신)만이 있다는 정의를 내리셨습니다. 신은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조상도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형님이 돌아가시고, 형수님께서 가장 마음 편하게 생각하신 곳은 절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냥 갖다가 바치는 절이 아니라... 초파일에 부처님께 내 소망을 비는 그런 절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님이 돌아가시고 미궐사 절에서 천도제를 지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형수님의 믿음은 신념에 찬 믿음이었습니다. 한 번은 대전 예식장에 들렸다 집에 돌아오다 반포에 있는 ‘MBC 방영, 신비한 돌부처가 있는 곳’에서 천원을 내놓고 소원을 빌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수님은 단 번에 거절을 하셨습니다. ‘왜, 쓸데없는 곳에 돈을 주느냐? 모두 쓸 데 없는 짓!’이라고 단언을 하셨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도 해보는데... 형수님은 절대 현혹되는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께서 시아버지에게 배운 제사 풍속이 깨져가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아버지 제사에 참석하지 않는 시동생 탓을 그렇게 하시더니, 당신 자식들이 제사에 참석하지 못할 때는 거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그런 心思(심사)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떠나시고 큰아들 찬0이와 형제들이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형제들끼리 의론을 하였답니다. 형제들이 힘을 모아 오순도순 지내기로 하였답니다. 이제 자식들 우애 문제는 걱정하지 마시고 먼저 가 계신 형님 만나 이승에서 풀지 못한 情談(정담)을 마음껏 풀어내시기 바랍니다.
그토록 고된 삶 속에서 한 시절의 희로애락을 같이 하셨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도 만나서 회포를 푸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이 땅의 모든 짐들은 이승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넘겨주시고 생사고락이 없는 저 하늘에서 영생복락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형수님!
형수님과 7살에 만나 제 나이 이제 57입니다. 첫 이방인으로 만남이후 50년만의 큰 이별이 되었군요.
당신의 자식들은 제가 이승에 있는 동안 잘 지켜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2009년 1월 24일 형수님이 저승으로 떠나는 날
시동생 박0서 두 번 절하고 아룁니다.
'성공을 향한 몸부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름에 담긴 삶의 이야기와 교훈 (0) | 2025.03.28 |
---|---|
변화 속의 항상(恒常) (0) | 2025.03.27 |
아호를 지어라. (5) | 2025.03.27 |
체계적 학습과 삶의 지혜 (0) | 2025.03.27 |
신중함과 절제의 미학: 그만둘 수 있는 일과 없는 일 (0) | 2025.03.27 |
"나"에 대한 성찰과 삶의 고찰 (1) | 2025.03.27 |
내면 여행의 성찰: 참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2) | 2025.03.27 |
마음 속 쓰레기를 비우고, 밝게 시작하라 (2) | 2025.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