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과의 무경계, 분별의 인위성, 침묵의 심오함: 존재의 근원적 미학
만물을 낳는 자는 만물과 사이를 두지 않는다(與物無際).
사물끼리 사이가 있는 것을 사물의 분별이라 한다(物際).
사람과 벌레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짓일 뿐이다.
모르는 곳은 깊고, 아는 쪽은 얕다.
‘모른다.’ 함은 내 안에 있고, ‘안다.’ 함은 내 밖이다.
불가(佛家)의 조주선사도 노랑 주둥아리 닥치라고 했다.
지극한 말은 침묵, 지극한 짓은 짓거리를 버린다.
오죽하면 빛 좋은 개살구라 하겠는가.
만물의 근원적인 통일성과 인간의 인위적인 분별 행위를 대비시키며, 진정한 깨달음은 침묵과 무위(無爲)를 통해 드러나는 심오한 아름다움을 지향함을 역설합니다.
1. 무경계(無際)의 근원적 아름다움: "만물을 낳는 자는 만물과 사이를 두지 않는다(與物無際)"라는 첫 문장은 우주의 근원적인 창조의 힘은 모든 존재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어떠한 경계나 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심오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이는 마치 거대한 생명체가 모든 세포와 연결되어 있듯, 만물은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된 근원적인 통일성의 아름다움을 지닙니다.
2. 분별(物際)의 인위적 추함: "사물끼리 사이가 있는 것을 사물의 분별이라 한다(物際). 사람과 벌레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짓일 뿐이다"라는 구절은 인간이 자신의 관점과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경계를 긋고 차별을 만들어내는 행위의 인위성을 폭로합니다. '다르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일 뿐, 본질적인 차이는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편협한 시각이 만들어내는 부자연스럽고 때로는 추한 분별의 미학을 드러냅니다.
3. 무지(無知)의 심오함과 유식(有識)의 피상성: "모르는 곳은 깊고, 아는 쪽은 얕다. ‘모른다.’ 함은 내 안에 있고, ‘안다.’ 함은 내 밖이다"라는 통찰은 인간의 지식은 피상적이고 제한적이지만, 알 수 없는 영역은 무궁무진하다는 깨달음을 제시합니다. 진정한 지혜는 안다고 주장하는 외적인 드러남보다, 모름을 인정하는 내면의 깊이에 있다는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조주선사의 침묵 역시 섣부른 언어적 규정보다는 침묵을 통해 더 깊은 진리를 암시하는 심오한 미학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4. 침묵과 무위(無爲)의 지극한 아름다움: "지극한 말은 침묵, 지극한 짓은 짓거리를 버린다"라는 단언은 진정으로 깊고 중요한 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으며, 진정한 행위는 인위적인 꾸밈이나 노력을 넘어선 자연스러운 무위(無爲)의 상태에서 드러난다는 깨달음을 제시합니다. 침묵과 무위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은 없지만, 깊고 진실한 아름다움을 내포합니다.
5. 피상적인 아름다움의 경계: "오죽하면 빛 좋은 개살구라 하겠는가?"라는 속담의 인용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매혹적일지라도, 내실이 없고 가치가 없는 피상적인 아름다움의 허망함을 경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 있는 시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현혹되지 않는 지혜로운 아름다움을 지향합니다.
결국 이 글은 만물의 근원적인 통일성과 인간의 인위적인 분별을 대비시키며, 피상적인 지식과 행동을 넘어 침묵과 무위(無爲)를 통해 드러나는 깊고 진실한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만물의 근원적인 연결성을 통찰하며, 침묵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지혜로운 삶의 태도를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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